왜 지금 마을공동체기본법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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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절벽 시대, 다시 마을을 생각하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프리카 속담으로 알려진 이 말에는 오랜 세월 동안 마을과 마을공동체가 수행해 온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 담겨 있다. 이웃이 아이를 알고, 학교와 주민이 함께 돌보며, 세대가 서로의 삶을 살피는 등 가족을 넘어선 돌봄과 관계가 필요하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창출하는 생산과 소비, 돌봄과 문화의 가치는 지역사회와 국가 전체가 공유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나누어야 할 책임을 부모에게 집중시킨 채 출산과 양육만을 권장하는 방식으로는 저출생과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산업화와 도시화, 인구 이동과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분리되고 주민 간 관계도 느슨해졌다. 돌봄과 교육, 문화와 여가 역시 공동체의 활동에서 개별 가정이 비용을 지불해 이용하는 서비스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인구 감소와 공동체 해체가 서로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인구 정책은 출산 장려금이나 양육비 지원을 넘어 마을과 공동체 기능의 활성화 정책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마을공동체의 회복은 인구감소 대응을 위한 부수적인 사업이 아니라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사회 기반이다.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물리적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주민이 생활하고 관계를 맺으며 공동의 경험을 축적하는 장소이자, 생활과 문화, 경제 활동과 돌봄이 연결되는 기초적인 삶의 단위이다. 그러나 같은 지역에 거주한다고 해서 공동체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을 안에서 공동의 필요와 관심사를 가진 주민들이 서로를 알고, 공동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방안을 논의하고, 역할과 책임을 나누는 경험이 반복될 때 마을공동체가 형성된다.
마을과 공동체는 법과 행정 제도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핵심은 공간적 근접성보다 관계와 신뢰, 참여와 협력에 있다.
마을공동체와 마을기업
마을공동체는 주민이 지역 정책의 수혜자에서 해결의 주체로 성장하는 자치의 기반이다. 주민들은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원을 배분한다. 하지만 갈등과 불신이 누적되면 주민 참여와 공동 사업이 위축된다.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주민 간 신뢰와 협력이 중요한 이유이다.
마을공동체는 주민의 삶을 지지하는 생활 안전망이 될 수 있다. 홀로 사는 노인, 돌봄이 필요한 아이, 이동이 어려운 주민, 사회적으로 고립된 가구를 먼저 돌보며 행정의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다.
빈집을 정비하거나 공동 돌봄을 시작하고, 지역 자원을 활용해 상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활동은 생활 환경 개선과 관계 형성에서 나아가 일자리와 소득 창출로 확산될 수 있다. 마을의 역사와 이야기, 음식과 기술, 공동체의 기억은 관광·문화 콘텐츠와 지역 상품이 될 수 있으며,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과 서비스를 주민이 이용하고 유휴 공간과 자원을 함께 활용하면 소득과 소비가 지역 안에서 순환하는 구조도 만들어진다.
그러나 돌봄과 빈집, 교통과 생활 서비스 부족 같은 문제는 행정만으로 해결하기 어렵고, 수익성이 낮아 시장에만 맡기기도 어렵다. 주민의 자원봉사와 희생에 의존하는 방식 역시 지속되기 힘들다.
따라서 마을공동체는 지역의 필요를 발견하고 주민 참여를 조직하며, 마을기업과 사회적협동조합은 이를 지속적인 서비스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행정은 제도와 재원을 지원하고, 민간기업과 대학, 금융기관, 중간지원조직은 전문성과 자원을 보탠다. 서로 다른 주체가 역할을 분담할 때 지역문제 해결과 경제적 지속가능성을 함께 추구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속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마을기업이다. 마을기업은 주민이 지역 자원을 활용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그 성과를 다시 공동체에 환원하는 경제 조직이다. 마을이 목적이고 마을공동체가 기반이라면, 마을기업은 공동체의 필요를 지속적인 상품과 서비스로 전환하는 실행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모든 마을공동체가 마을기업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 활동 자체로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이 있는 반면, 안정적인 서비스와 일자리를 위해 수익 구조가 필요한 영역도 있다. 공동체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금과 사업체부터 만들면 일부 주민에게 업무가 집중되고 지원 종료 후 사업이 중단될 가능성이 크다. 사람과 관계가 충분히 성장한 뒤 사업이 만들어지고, 그 성과가 다시 일자리와 돌봄, 공동 자산으로 환원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공모 사업을 넘어 지속적인 제도로
마을공동체가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관련 정책은 안정적인 법적 기반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그동안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다양한 마을만들기 사업을 추진했지만, 상당수는 개별 조례와 공모사업, 한시적인 예산에 의존해 왔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정책 방향이나 담당 부서, 예산이 바뀔 때 주민 활동과 지원 체계도 쉽게 중단될 수 있다. 마을공동체가 주민의 삶을 지탱하는 공공적 기반임에도 지속적으로 보장해야 할 정책이 아니라 행정이 선택하는 단위 사업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다.
공모 사업 중심의 정책은 주민을 지역 문제의 주체보다 사업의 신청자와 수행자로 머물게 할 가능성도 있다. 주민이 직접 문제를 정의하기보다 행정이 정한 분야와 기준에 맞춰 계획서를 작성하고, 선정 이후에는 집행률과 참여 인원, 행사 횟수와 같은 단기 실적 관리에 집중하게 된다. 사업이 끝나면 주민 모임과 활동도 함께 중단되는 일이 반복된다.
따라서 마을공동체 정책은 새로운 보조사업을 추가하는 차원을 넘어야 한다. 주민이 지역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방안을 논의하며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리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마을을 행정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주민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기본 생활공간이자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반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주민과 공동체의 성장을 보장하는 제도적 기반
공동체의 형성과 주민의 역량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민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고 공동의 의제를 발견하며,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갈등 조정 능력이 축적되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사업 체계에서는 주민 교육과 관계 형성, 의제 발굴과 갈등 조정은 성과를 수치로 나타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부수적으로 다뤄지고 있어 시설 조성과 단기적인 성과가 우선되기 쉽다. 그 결과 공동체가 충분히 형성되기 전에 시설이나 사업조직부터 만들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주민의 학습과 참여를 특정 사업의 준비 단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장해야 할 정책 영역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주민 교육과 조직화, 의제 발굴, 갈등 조정, 사업 모델 구축과 경영 지원이 단계적으로 연계되면 공동체의 성장이 마을기업과 사회적경제 조직의 지속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방소멸 시대에는 마을공동체의 참여를 거주자에 한정하지 않고, 지역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까지 범위를 넓혀 이들의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지역 활동과 마을기업의 성장에 연결할 필요가 있다.
관계인구는 부족한 소비와 노동력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기술, 경험과 네트워크를 지역에 연결할 수 있다. 다만 기존 주민의 생활과 권리를 중심에 두면서 관계인구의 참여 범위와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관계인구는 지역의 소비자를 넘어 기획자, 홍보자, 협력자 또는 잠재적 정주자로 성장할 수 있다.
또한 지역계획과 위원회, 기금, 공유재산, 전문 인력과 지원 체계를 통해 행정과 주민, 마을기업, 민간기업, 대학 등이 지속적으로 협력하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행정이 공동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원과 역량을 연결하는 것이다.
'마을공동체 활성화 기본법안'의 의미
현재 국회에는 박정현 의원 등 31인이 2025년 2월 27일 발의한 '마을공동체 활성화 기본법안'이 계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마을기본법'은 현재 시행 중인 법률의 명칭이 아니라 국회에서 논의 중인 제정법안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법안은 주민의 주도성과 자발적 참여, 다양성과 독립성, 책임성과 공익성, 민주적 운영을 기본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주요 내용에는 마을공동체계획과 국가·지방자치단체의 기본계획 및 지역계획 수립, 위원회 설치, 전문 인력 양성, 정보와 통계 관리, 기금 조성, 국유·공유재산 활용 지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법안의 중요한 의미는 주민을 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라 계획의 수립과 실행 주체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마을공동체의 본질은 행정이 정한 사업을 주민이 대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이 공동의 문제를 정의하고 필요한 자원과 역할을 논의하며 그 결과를 함께 책임지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마을기본법'은 행정이 마을을 관리하거나 공동체 활동을 표준화하기 위한 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민의 자발적인 활동에 필요한 제도와 재정, 공간과 정보, 교육과 연결망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기반이 되어야 한다.
'마을기본법'의 필요성에 공감하더라도 법의 내용과 운영 방식은 신중하게 설계해야 한다. 새로운 위원회와 지원 체계가 기존 주민자치회와 중복되거나, 행정이 인정한 공동체만 지원받는 구조가 되면 자발적인 주민활동이 오히려 위축될 수 있다. 마을마다 역사와 인구 구성, 생활 환경과 공동체 경험이 다른 만큼 획일적인 조직 형태와 평가 기준을 적용해서도 안 된다.
법의 목적은 공동체를 행정조직에 편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자율성과 참여할 권리를 보장하는 데 두어야 한다. 주민자치회와 마을공동체, 마을기업 등 기존 조직 간 역할도 명확히 정리해 불필요한 중복과 경쟁을 방지해야 한다.
성과 평가 역시 사업비 집행률이나 행사 횟수, 참여 인원과 매출 같은 단기 지표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주민 참여의 확대, 신뢰와 협력의 축적, 지역 문제 해결, 돌봄 관계망의 형성, 지역 자원의 순환과 공동 자산 증가 등 공동체적 성과를 함께 살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법률로 마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스스로 형성되고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일이다.
이러한 원칙 위에서 '마을기본법'이 제정된다면 공동체 활동은 일회성 공모사업을 넘어 지역의 지속적인 역량으로 축적될 수 있다. 주민의 성장은 마을공동체와 마을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그 성과는 다시 지역의 돌봄과 일자리, 소득과 공동자산으로 환원되는 선순환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가정의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마을이 시작된다. 마을은 개인과 가정, 지역 사회와 도시, 더 나아가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느슨하면서도 주민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작동되는 사회적 공간이자 관계이다.
우리는 초고령화와 초저출생으로 대표되는 지역의 당면 과제와 1인 가구의 급증에 따른 마을과 마을공동체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이는 개인이 감당할 범위를 한참 초과한 문제이며, 시장을 통해서는 조달과 공급이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이다. 기존의 법과 제도나 사회의 행동 양식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음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더 미룰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제 우리 사회와 공동체로부터의 가장 절실한 요구에 답을 할 시간이다. 마을과 마을공동체의 미래를 위하여!
박철훈((사)지역과소셜비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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